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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이재희

표면 위에 남겨진 흔적은 이름 없는 누군가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지는 존재와 기억을 품고 있다. 나는 인천의 거리와 골목을 걸으며, 벽에 남겨진 낙서나 그래피티, 무심히 그어진 페인트 자국 같은 익명의 흔적을 관찰하고 그 표면을 따라 그린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손길과 시간이 스며든 자취로, 사라짐과 존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흔적들을 회화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보존’의 제스처를 취한다. 사라져가는 흔적과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행위는, 잊힌 존재들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되살리는 일종의 제의적 행위로 작동한다. 관찰과 그리기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잊혀진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흔적을 보존하고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나의 작업은 개인적인 상실에서 출발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배 안에서 그분의 흔적을 찾아 채색화로 복원했던 경험은 한 개인의 부재를 다루는 동시에, 사라진 존재를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이었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리움의 범위가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 타인의 흔적과 시간이 배어 있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인천은 그리움이 처음 생겨난 장소이자, 사라짐과 존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그 표면을 따라 그리는 일은 잊혀진 시간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도시의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다.

결국 나의 회화는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복원하며, 사라지지 않게 붙잡는 행위를 통해 그리움이 머무는 표면을 탐구하는 일이다.

<Infinity 1/125s_1>, 장지에 채색, 72.7×53.0cm, 2025
<Infinity 1/125s_2>, 장지에 채색, 50.0×50.0cm, 2025 094
<Infinity 1/125s_3>, 장지에 채색, 53.3×75.5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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